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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가 없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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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동료인 멜랑히톤, 칼슈타트  그리고 수
                                                             정동 마중물
               도회 동료들이 주동이 되어 구체적인 교회개
                                                           ‘마중물’이란 펌프로 물을 퍼올릴 때
               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사제만 거행하던 성찬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붓는 물입니다.
                                                                                     김선정 권사
               식이 모든 평신도에게 베풀어졌고, 예배는 라
               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종교 개혁과 맞물려 농민 운동도 일어났습니
               다. 그동안 귀족과 교회의 횡포에 눌려 살던 농
               민들이 여기저기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루터는 각자에게 신앙의 책임의식을 강조하
               고 개혁을 위한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
               려 줄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이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싹부터 잘리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폭동
               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넉 달이 채 못 되어 농
               민 전쟁은 참담한 결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수천 명의 농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 농민 전
               쟁으로 인해 루터는 개혁의 뒷자리로 물러났
               습니다. 민중들이 루터에 대해 강한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3) 안드레아스 폰 칼슈타트(1480~1541)는 독일의 종교개
               혁 급진파의 한 사람으로 에르푸르트, 퀼른에서 공부하고 비
               텐베르크대학 신학교수로서 루터의 스승, 후에 동료가 되었
               다. 그 영향 하에 복음주의로 바뀌었는데, 결국에 더 한층 철
               저한 개혁을 지향하고, 성서론, 직제론, 성찬론 등에서 루터
               와 대립, 루터의 격렬한 비판을 받아서 그곳을 떠나서 농민전
               쟁의 혼란 중에서 각지를 전전했다. 쯔빙글리의 비호로 취리
               히, 후에 바젤에서 교수, 설교자로서 평생을 끝마쳤다.


                                                                                         2026 /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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