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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짧은 지면이지만, 종교개혁 3대원리가 어떻게 새롭게 이해           이 결혼도 가정도 포기한 상태로 살고 있는 현실이다. 자본주
             되어야 할 것인지를 짧게 언급해 보겠다. 종교개혁 500년을           의 체제하의 경제 원리만을 갖고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우리 시대에 부끄럽지 않게 축하하고, 축하받으려면 우리들             없다. 성서는 하늘나라 비유를 통해 언제 부름을 받든지 동일
             사고가 좀 더 신학적이 될 필요가 있다. 평신도들에게도 신앙           한 품삯을 주라 했고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을 불러 잔치를
             만이 아니라 신학이 요구된다. 좀 더 성서에 근접한 신앙관을           베풀라하였다. 자본주의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경제적 인과관
             얻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우선적으로 ‘오직 믿음’은 중세 천년          계를 끊고 항시 그보다는 좀 더 많은 것(More)을 베풀라 한
             을 이끈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원리로서 훌륭했다. 이는 중            것이다. 바로 이런 행위가 하나님 은총에 상응한다. 하나님의
             세 가톨릭교회라는 역사적 현상에 대한 당대의 신학적 해결             정의는 이렇듯 법을 넘고 경제를 넘어서 있다. 이런 삶(정의)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직 믿음’은 로마서가 쓰여 진 역사         은 현실에서 불가능할 수 있겠으나 성서는 그것을 하나님 은
             적 현장과 시간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 다시 읽혀져야 할 것이           총이라 일컫는다. 그래서 옛적 성인은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
             다. 한마디로 종교개혁자들의 시각으로부터 로마서를 자유롭             을 사랑하는 자, 너는 정말 무엇을 사랑하는가?’라고. 우리들
             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로마서는 결코 ‘행위 없는 믿음’         삶 속에서 불가능한 것(하나님 정의)을 행하는 것, 바로 그것
             을 가르치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믿음 없는 행위’를 걱정         이 은총이다.
             하고 염려했던 책이었다. 그리스도 안의 존재(Sein in Christo)     마지막으로 ‘오직 성서’를 말할 차례이다. 성서가 하나님 말
             라는 새 위상을 얻었음에도 여전히 당시를 지배하던 로마식             씀이자 계시인 것을 부정하는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다. 하지
             가치관에 젖어 사는 것을 문제시 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독          만 루터가 앞서 말했듯이 성서 속에 하나님 말씀이 있는 것
             교인으로 부름 받았음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적 물질주의의 가             이지 문자 그 자체가 그분 계시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
             치관에 따라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바울이 염려하던            교회는 성서 속 문자에 사로잡혀 성서를 교리로 만들고 있다.
             ‘행위 없는 믿음’일 것이다. 실제로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 기          성서수호를 넘어 교리수호까지 외치고 있으니 변화하는 세상
             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를 풀어주었고 여성에 대             과의 공감과 교감을 점점 더 어렵게 한다. 성서 66권 안에 하
             한 남성의 가부장적 폭력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로마체제와의             나님 계시가 완결되어 있다고 믿는 것도 그 분을 과거 속에
             결별을 선언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염려할 것 역시 ‘믿음           한정시키는 일일 수 있다. 만물 위에 계시나 만물 안에 존재
             없는 행위’여야 할 것이다.                             하고 만물을 통해 일하는 그 분이 지금도 계시적 사건을 지
               ‘오직 은총’ 역시 동일하다. 그간 우리는 은총의 낙관주의          속적으로 행한다는 것이 더 큰 믿음일 수 있다. 따라서 ‘오직
             를 말하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의 교리를 신봉해왔다. 인간의            성서’는 다음의 세 눈(觀)을 통해 설명되어야 옳다. 믿음의 눈,
             자유의지를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감리교를 교조적 장로교에              의심의 눈 그리고 자기발견의 눈이 그것이다. 주지하듯 성서
             서 문제시 했던 역사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은총에도 그리스           는 우리에게 믿음의 책이다. ‘내가 성서를 읽지만 성서가 오
             도의 구원을 강조하는 ‘적색은총’이 있고 자연이 주는 ‘녹색은          히려 내 삶을 읽는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만큼 성서는 우리
             총’이 있건만 지금껏 교회는 ‘적색은총’의 차원에서 인간과 하          에게 하나님을 계시하는 경전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
             나님 간의 절대적 차이만을 강조해왔다. 희랍 철학의 절대적            에 긴 세월에 걸쳐 쓰여 진 성서는 건강한 의심의 눈을 거쳐
             영향 하에서 은총은 항시 인간의 이성이나 자유와 대비되는             야 이념이 아닌 말씀으로 우리와 만날 수 있다. 수많은 성서비
             것이었던 탓이다. 어거스틴 이후로 이런 식의 은총이 절대화            평의 작업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점에서 평신도들
             되었고 개신교의 경우 ‘신앙유비’(Analogia fidei) 곧 “믿음의   역시 신학적 책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성직자에 의한 믿음
             분수”라는 말로 정식화되었다. 곧 하나님의 은총은 영적인 은           이 아니라 신앙의인(信仰義認)임을 믿고자 한다면 이 역시 감
             총만 의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아우슈비츠 경          당할 일이다. 목회자들 역시 이런 가르침을 두려워하거나 주
             험과 JPIC(정의, 평화, 창조 보존) 대회를 통해 은총은 탈(脫)      저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진정코 성도들에게 돌이 아닌 떡을
             희랍화 된 유대(주의)적 사유의 틀에서 달리 이해되기 시작했           주려 한다면 건강한 의심을 품게 하라. 그래서 더 크게 더 뚜
             다. 은총을 ‘하나님 정의’의 차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렷하게 우리의 삶과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할 일이다.
             한마디로 하나님 정의가 은총이란 말이다. 주지하듯 세상은             그래서 모두를 품는 하나님을 발견하여 나를 발견하는 자기
             법을 통해 정의를 세우려 하지만 법 자체가 부(不)정의, 탈(脫)        발견의 눈이 열려야 할 것이다. 절대(絶對)란 타자를 부정하는
             법화를 묵인하고 용인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 않은가? 세상             방식으로 존립하지 않는다. 타자를 품을 수 있는 너른 품속에
             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도는 것도 이런 현실의          서만 가능한 언어이다. 이때 모든 민족과 지구와 우주 전체를
             반영일 것이다. 돈으로 법을 사서 불법을 정당화하는 구조 속           품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에서 법은 결코 정의를 보장할 수 없으며 이것이 우리들의 일             종교개혁 500년 역사를 어찌 넘어설 것인가? 그리고 어떻
             상의 경험이 되어버렸다. 이웃 나라에서 온 난민에 대한 환대,          게 새로운 미래를 열 것인가? 이 주제를 붙잡고 치열하게 고
             이것은 아마도 법을 넘어선 하나님 정의의 실현일 것이다. 경           민할 일이다. 개신교 신앙 3대원리가 우리 교회 내부부터 다
             제영역에서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             시 복음화시킬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 봇물을 이루고 있으며 일자리 자체를 얻지 못한 젊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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