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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종교개혁 498주년 기념
종교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Die Reformation geht weiter)
이정배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위의 제목은 필자 개인의 말이 아니다. 1517년 M. 루터 종 교와 유교의 역사가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땅
교개혁이 있은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서구 기독교 내에서 반 에 유입된 개신교는 130여 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빠
복적으로 언급된 말 이었다. 정확히 2년 앞으로 다가온 종교 르게 초심을 잃어가고 있다. 개혁을 통해 생겨난 개신교가 개
개혁 500년 동안 수많은 신학자들이 루터를 넘고자 했고 그 혁의 대상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며 심지어
의 신학을 수정하자 했다. 17세기 말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 “교회가 죽어야 기독교가 산다”는 말이 세간에 떠돌고 있다.
의 운동이 칭의(稱義)가 아닌 중생(重生)을 강조하면서 그랬 이 땅을 찾았던 교황이 “복음의 기쁨”이란 책자를 통해 한 말
고, 20세기 국가교회를 비판했던 키에르케고르 역시 루터 비 이 기억난다. ‘교회 내의 복음화 없이는 세상의 복음화 없다’는
판의 주역이었고 올해로 서거 70년을 맞는 신학자 본 회퍼 말이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탓에 세상이 복음의 기쁨에 냉
가 루터교에 속했으면서도 루터를 넘고자 했다. 특히 본 회퍼 담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일차적으로 성직자들이 그리고 신도
는 개신교에서 한 치의 오차도 불허라는 ‘오직 믿음’(Sola fide) 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신자로
을 비판하면서 루터가 이 시대에 다시 올 경우 자신의 이 말 남아있는 한 제도로서의 교회는 존재하되 세상의 복음화는
을 거둬들였을 것이란 말을 남기기까지 하였다. ‘오직 믿음’이 요원할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예수의 제자를 키워내지 못하
란 교리가 한국 교회에서 너무도 오용된 탓에 본 회퍼의 말은 고 교인, 신도만 양산하는 것일까? 삶이 부재한 믿음에 대해
깊게 숙고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예수와의 동시성을 만들 수 없
왜냐하면, 모든 신학적 질문과 대답은 구체적인 시공간 속 는 교회는 기독교를 영지주의(가현설)로 만드는 것이라 일갈
에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무시간적으로 타당한 교리는 한 본 회퍼의 고언(苦言)을 다시 기억할 일이다.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대답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일수록 시 들리는 바로는 중세의 면죄부보다 개신교의 3대 원리인 ‘오
공간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찾아내야 한다. 의로운 자 직 믿음’, ‘오직 은총’ 그리고 ‘오직 성서’가 더 타락했다는 감당
욥의 고통에 대해 당시의 신학, 곧 신명기사관은 아무런 대답 키 어려운 비판이 신학계에서 일고 있다. 종교개혁 3대 원리
을 줄 수 없었다. 우리는 물을 수 밖에 없다. 무고한 자가 축 에 대한 비판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시작되어야 한다
복 대신에 죽거나 고통 속에 있는 현실에 대해 오늘의 신학과 는 당위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삶이 없는 믿음, 예수 살기 없
교회는 충분한 답을 주고 있는가? 우리에겐 돌덩이 같은 교리 는 예수신앙은 그토록 다른 것들과 구별되기를 좋아하며 계
가 아니라 생명의 떡이 필요한 것이다. 신채호나 함석헌의 말 시종교임을 자랑했던 기독교를 한갓 ‘종교’로 전락 시킬 수 있
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남의 것을 숭상하며 자신 것을 기 때문이다. 로마가 기독교화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로마
하찮게 여기는 못된 습관이 남아있다. 우리는 큰 나라에 기대 화되었다고 가톨릭교회를 비판했던 개신교가 이제 그 힘을
며 살아왔고 나라 잃은 백성이 되기도 했으며 숙명론에 젖은 잃어가고 있다. 중세를 극복하고 자본주의를 잉태한 개신교
결과, 서구 사조와 생각을 조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이 가 이제는 정작 자본주의를 닮아가고 있다. 곧, 기독교의 존재
땅 조선을 쉽게 그들의 것으로 만들곤 했다. 무엇이든지 절대 양식 자체가 자본주의화 되어서, 세상과의 변별력을 잃어가고
적 교리가 되면 우리는 그의 노예가 될 뿐 자유를 잃는다. 생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 현상은 ‘슬퍼하는 자들과 울라’는 성서
각하는 힘을 잃는 까닭이다. 성서의 예수께서 우리에게 준 가 의 말씀에 대해 냉담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수천억 들여 교회
장 큰 선물은 자유가 아니던가? ‘내가 너희를 자유하게 했으 건물을 건축하고 있다. 히틀러 당시 아우슈비츠 사건을 통해
니 다시는 종의 노예가 되지 말라’(갈 5:1) 바울은 이렇게 선포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으나 정작 죽은 것은 그들 죽음
했다. 종교개혁의 원리가 담긴 루터의 3대 논문 중 하나가 “교 에 동조한 기독교였다는 말이 나왔듯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회의 바벨론 포로로 부터의 해방”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기 대형교회의 무관심은 기독교의 민낯을 그대로 세상에 드러낸
독자의 자유’라고 하는 그의 논문 역시 같은 뜻을 품고 역사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개신교 교단 내 장로교
를 바꿔냈었다. 어느 한 종파는 기독교를 행위 없이도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
이 땅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아무리 융성했던 종교라 할지 받을 수 있는 종교’라 천명했으니 교회를 향한 세상의 우려가
라도, 500년간 그 역사를 옳게 유지시키기가 버거웠었다. 불 어찌 그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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