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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2010년 여름이었어요. 제가 특히 좋아했던 에이즈 아동이 있었는데, 반에서 늘 1, 2등 하는
똑똑하고 예쁜 아이였어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감기가 걸렸는데, 면역력이 낮아 폐렴
으로 이어졌고, 폐 하나가 6개월 만에 없어지더라고요. 결국 그 아이가 하늘나라로 갔는데,
그 아이를 보내고 우울증이 왔던 것 같아요.”
Q.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그 즈음 송기성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정 선교사 잘 있어?’ 하고 전화가 왔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목사님, 저 위해 기도 좀 해주세요. 저 정말 기도가 필요해요’라
고 말했죠. 그 후 교회에서 계속 기도해 주시고, 이한나 권사님이 젊은이교회 친구들 주머니
를 털어 필요한 물품들을 모아서 직접 우간다로 날아와 줬죠. 기도와 사랑이 있었기에 외롭
지 않고 용기 잃지 않고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Q. 혹시 중간에 돌아갈래라는 생각을 하신 일은 없었나요?
“전혀요. 1도 없었고요. 정동교회 우간다 기도회가 뒤에서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몰라요.
낙심하지 않고 지치지 않도록 독려해 주셨죠. 제가 모르는, 이름 모를 분들의 기도에 의해서
우간다 사역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Q. 우간다에 있는 18년 중에 가장 기뻤던 장면을 세 가지 뽑아주실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HIV 바이러스가 뇌를 공격해 정신착란이 일어나 집에 불을 질렀던 아이예요. 신
체의 반이 마비되어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글도 못 쓰고, 걷지도 못했어요. 운 좋게 에이즈 전
문 내과 선생님을 만나 집중 치료를 받은 후 마비가 풀려 말하고, 글 쓰고, 걸을 수 있게 됐
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셨
구나 하는 감사함이 컸습니다.”
Q. 두 번째로 기뻤던 장면은요?
“아모리아 청소년 센터를 세운 일이에요.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할 센터가 필요했는데, 기도
하던 중 하나님께서 놀랍게 인도하셨어요. 교통사고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는데, 오히려 그
시간에 유명한 건축 교수님이 설계도를 그려주시고, 일면식도 없던 중소기업 회장님이 회사
순이익금의 9%를 건축비로 후원해 주셨죠. 임종범 권사님이 직장까지 사표 내고 우간다로
와서 건축을 진행한 끝에 2014년 센터가 완공됐을 때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2025 / 5·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