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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병헌 목사님의 후손이라는 점이 때론 부담이 됐을 것 같습니다.
백 권사 :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오면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
게 믿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있었어요. 나이가 들어보니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이 우주의 신
비, 지구의 모든 생명체, 작은 곤충에서부터 엄청난 생물, 식물, 바다는 바다대로 날짐승은
날짐승대로... 엄청난 생명체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신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가 없다
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날파리 하나도 만들어낼 수 없거든요.
최 권사 : 우리는 모태신앙인데 태어났을 때 선택사항이 아니었잖아요. 기독교 집안이고 기
독교를 믿으라 하는 것인데, 우리가 선택을 한다면 선택하기 전에 고민을 하게 되고 그런
과정이 있으면 더 열심일 텐데, 우리는 선택이 아니다 보니 신앙에 대한 고민이나 갈등도
없겠지만, 의지도 부족했어요.
그러다 보니 성인이 됐을 때 다시 고민하게 되죠. 어떤 의미인가 하고요. 오히려 살면서 어
려운 일을 겪게 되고 의지할 데를 찾게 되면서 신앙심을 갖게 됩니다.
Q. 다른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계신가요?
백 권사 : 교육, 음악, 기독교가 집안의 중요한 전통입니다. 최병헌 목사님의 첫째 아들 최재
학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에 가담해 탄압을 받으셨고, 그 후손들은 대부분 미국에 계십니다.
최재학의 후손 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학박사(최황)도 있고, 최초로 쇼팽을 협연한 피
아니스트도 있어요.
둘째 아들 최재원 할아버지는 일본 관비 유학생으로 동경제국대학을 나오셨고, 정동교회
장로를 역임하셨죠. 후손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딸 최메리 할머니는 남편이 김진태 목사님이고, 아들(김상모)과 딸(김효모)도 목사님이 되
셨습니다.
Q. 정동교회가 140년 전 어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최 권사 :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정동교회는 단순히 종교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문
제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서구 정신문명의 중요한 핵심이었어요.
최병헌 목사님도 YMCA 청년부장을 하면서 청년운동에 관여하셨고, 1909년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3.1운동에도 배경이 되었을 것이고, 정동교회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33인에 이름
을 올렸는데, 이는 정동교회의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사회가 혼란의 시기인데, 140년 전을 본다면 교회가 종교적
기능만 하는 게 아니라 사회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정치적 역할을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들에 교회가 함께 나서서 해결하고 봉사할 수 있다면 정동교회의 처
음 역할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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