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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져왔다. 전도사님의 인도로 맺어진 여선교 키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하셨다. 한때 나에
회와의 인연으로 역대 총회장(오주경 장로, 김 게 “간장종지”(식탁 위의 필수)라는 별명까지
옥라 장로, 문태임 장로)들은 나의 인생의 멘 붙여주시면서 이뻐해 주셨고 결국 나 역시 전
토가 되었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도사님의 중매 사역의 수혜자가 되었다. 나는
를 그분들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1968년에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전도사님의
2004년 내가 여선교회 총회장을 역임할 때 이 중매로 김남현 권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진주 전도사의 큰 따님인 장혜경 권사가 장로 런저런 이유로 1년 넘게 힘들게 해드린 죄송함
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 후 장활란 둘째 따 이 아직도 마음 가운데 남아있다. 전도사님은
님이 또 장로가 되었고 전도사님은 가문의 경 남편을 “우리 김권사, 우리 김권사” 하면서 무
사라고 하시면서 무척 기뻐하셨다. 전도사님 척 사랑해 주셨고 남편도 전도사님을 무척 좋
은 효심이 지극한 훌륭한 딸들 덕분에 호강하 아하고 따랐다. 하나님을 섬기는 장성한 세 자
시면서 사위가 운영하는 서산활란 양로원에서 녀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면 전도사님을 통한
평안한 말년을 보내셨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얼마나 놀라운지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운동> 이 글에서 일일히 이름을 거론하기 어렵지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대표적 성결 운동의 수많은 커플들이 전도사님의 소개로 만나 세
시작점에 절제회가 있었다.절제회는 근검절약, 계 방방곡곡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금연금주, 국산품 애용 등 당시 한국 사회에 있 있다. 하나님은 전도사님을 통해 정동에 믿음
어 병폐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기독교적 그리고 의 가정들을 계획하시고, 가정들의 복음화를
애국적 가치관의 확립을 위해 많은 캠페인과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믿음의 후손들이 대를
행사를 했었다. 서울시 절제회의 선봉장 역할 이어 주님을 섬기는 영광을 허락하셨다.
을 하였던 교회가 정동교회였고 서울역 등 번
화한 곳에 띠를 두르고 가서 자료를 나누어주 <속회>
는 일의 제일 앞자리에서 진두지휘하셨던 분은 1980년도 4구역(동서남북)에서 8구역으로 배
항상 전도사님이셨다. 절제회 월례회 때마다 가 되면서 흩어져 사는 성도들을 모으고, 나
말씀을 전하실 경우에는 꼭 나에게 특송을 부 누는 작업이 계속 이어져 오다가 2024년 11구
탁하셔서 미천한 재능을 주님께 올려드렸다. 역 97속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나는 곽
만영 장로님이 교회 사택(현 교회 정문 앞 분
<하나님의 중매쟁이> 수대 자리)으로 입주하게 되시면서 전도사님
1960년대 전도사님은 세 따님을 키우면서 일 의 권유로 장로님이 사시던 합정동 집으로 이
찍이 사윗감에 관심이 많으셨고 중매를 많이 사하게 되었다. 그 후 마포속, 합정동속 인도자
하셨다. 8년간 중구 용산지방 회장 겸 총무로 로 15년간을 지역 속원들과 함께 삶을 나누었
활동하면서 우리교회 젊은이들을 그냥 두지 다. 초기에는 속회마다 교인들이 교회에 잘 적
않으셨다. 예수님을 믿는 거룩한 가정을 만들 응하고 정착할 수 있도록 두 전도사님이 번갈
어내시려 신부감과 신랑감을 소개받아 성사시 아가면서 속회를 심방하고 인도하는 수고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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