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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사님과 함께 한 기나긴 시간 너무나도 많                 <벧엘 예배당에서 거행된 고 이승만 대통령의 장례식>

               은 추억이 있었으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전도                 1965년(김광우 목사 시무) 7월 19일 이승만
               사님의 다양한 모습들을 떠올려 본다.                     박사(장로)가 하와이 망명생활 중 서거하였
                                                        다. 특별비행기 편으로 시신을 운구, 김포공
               <사역의 동반자 곽만영 전도사>                        항을 거쳐 이화장에 빈소를 마련하고 7월 27

               1957년(제 13대 박창현 목사 시무)에 전도사로             일 본교회에서 영결예배를 드렸다. 이때 전도
               부임하였을 때 그 분 옆에는 또 한 분의 영적 지              사님은 젊은이들과 밤새워 가면서 벧엘예배
               도자 곽만영  장로님(전도사)이 계셨다. 장로님               당 안벽을 온통 검은 천 장식으로 꾸며 조의
               역시 정동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단짝이셨던                를 표했다. 3군 군악대와 태극기를 덮은 관

               두 분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덕을 잊을 수                이 성가대석 바로 내 앞에 자리하여 매우 엄
               가 없다. 항상 문을 먼저 두드리며 찾아오는 두               숙하고 장엄한 의식을 가까이 볼 수 있었기에
               전도사님을 교우들은 영적 부모님으로 따랐고,                 전도사님과의 이날의 기억은 나에게 있어 더
               좋아했고, 존경했고, 또 신뢰했다. 두 분은 항상              욱 특별한 기억이 되었다. 장례식에는 성가대

               교우들과 삶을 나누기를 원하셨고 하나님이 예                 원 이외에는 참석자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비하신 두 분의 훌륭한 인격과 위트와 유머는                 소프라노 이인숙씨가 조가 “멀리, 멀리 갔더
               교우들에게 큰 활력이 되었다.                         니”(찬 387장)를 불렀다. 여호사밧왕의 때와
                                                        같이 찬양대가 선두차로 동작동 국군묘지 현

               <해외 선교의 태동을 이룬 청년부 농촌선교 봉사활동>            충원으로 향할 때에는 서울 시내 4대문 안이
               1962년 청년부 시절 3년 내내 부회장으로 농               전면 통제되어 있었고, 용산길과 노량진길 가
               촌 봉사활동 대열 선두에 서게 된 나는 인천                 도는 인파로 붐벼 사상자까지 속출하는 광경
               앞바다 대무의도에 교회를 세워주는 일에 동                  을 목격하기도 했다. 전도사님의 노고가 빛을

               참하게 되었다. 당시 인천지방 감리사로 계셨                 발한 이날의 행사로 인해 나는 교회와 하나
               던 김봉록 감리사와의 인연이 이때 시작되었                  님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졌다.
               다. 대무의도 지역은 열악한 환경 가운데 본
               토와 교류가 자주 일어나지 않는 곳이었고 지                 <여선교회>

               역민들은 전도사님을 앞장 세운 우리의 일행                  전도사님은 교회의 중요한 살림을 1950년대
               의 모습을 보고는 매우 신기해하였던 기억이                  부터 도맡아 해오셨다. 그러다가 1978년 4월
               난다. 이 선교활동이 그다음 해인 1965년 말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 임원 수련회에서 여
               레이시아 사라왁 해외선교(김성욱 목사)를                   선교회의 발전을 위해 문태임 장로의 발의로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 전도사님은 청년                 여선교회를 3부(한나회, 레아회, 사라회)로 나
               부, 교회학교, 성가대, 수련회 등을 망라한 모               누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나는 30-40대 한나
               든 교회 행사의 안 보이는 자리에서 섬김의                  회 초대 회장으로 전도사님의 지명을 받았다.
               본이 되어주셨다. 아직도 몸빼바지에 앞치마                  여선교회는 그다음 해인 1979년 1, 2, 3 여선

               를 두르고 주방을 지휘하던 전도사님의 모습                  교회로 다시 나누어졌고, 그 후 7여선교회, 또
               이 눈에 아른거린다.                              10여선교회로 확장을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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