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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종교적인 성격이 강했던 오라토리오는 오                  멘델스존의 집안은 부유했다. 그의 할아버지
               페라가 금지된 사순절에 집중적으로 무대에                   는 당대 유명한 철학자였고, 아버지는 성공한

               올랐고, 대중의 관심을 얻기 위해 양식적으로                 은행 설립자였다. 유대인이었지만 어린 시절
               오페라에 가까워졌더라도 공연은 콘서트의                    에 가족과 함께 개신교로 개종하고 공식적인
               형태를 유지했다.                                성도 ‘바르톨디’로 개명했다. 시인 괴테를 비
                                                        롯한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의 집을 방문했

               오라토리오는 헨델 덕분에 영국적 장르라는                   으며, 저녁에는 가족이 참여하는 연극 공연이
               인식이 자리 잡았고, 유럽 음악가들은 이 독                 나 음악회를 열곤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멘
               특한 현상을 주의 깊게 보았다. 그래서 런던                 델스존의 잠재적 재능은 자연스럽게 계발되
               을 방문하는 음악가들은 오라토리오를 관람                   었고, 당대 유능한 음악 선생이었던 칼 프리

               했는데, 그중에는 교향곡으로 영국에서 큰                   드리히 첼터의 지도를 받으며 세심하게 완성
               인기를 얻은 요제프 하이든(1732-1809)도 있             되었다. 첼터는 작곡을 기초부터 철저하게 가
               었다. 헨델의 <메시아>에 크게 감동한 하이                 르쳤으며, 헨델,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훔
               든은 자신도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로 마음                   멜 등 선배 거장들의 작품을 공부하도록 했

               먹었다. 그는 가사로 천지창조를 소재로 쓴 존                다. 그럼에도 불과 10세 때에 후기 바로크와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을 택했고, 독일어                  고전주의 스타일을 융합하여 자유롭게 작곡
               번역에 음악을 붙여 빈에서 오라토리오 <천지                 했다는 점은 진정 놀라운 일이다.
               창조>(1797-98)를 초연했다. 오라토리오가 역

               수입된 순간이었다.                               1822년, 멘델스존은 불과 13세에 ‘작품번호
                                                        1’을 내놓으며 전문 작곡가로서 출사표를 던
                                                        졌다. 개성적이고 과감한 표현들을 사용하기
               멘델스존과 오라토리오                              시작했고, 놀라운 신선함과 감정적 힘을 지닌

                                                        음악을 꾸준히 만들어냈다. 그러면서도 옛 거
               하지만 이후에 오라토리오는 유럽 대륙에서                   장에 대한 탐구는 끊임없이 이어갔는데, 그
               인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19세기 들어 계몽                 절정이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그린 요한 제바
               주의에 대한 회의로 감정을 중시하는 낭만주                  스티안 바흐(1685-1750)의 오라토리오 <마태

               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종교음악 자체가 구시                  수난곡>(1727)을 다시 무대에 올린 사건이다.
               대적으로 보였다. 이때 오라토리오를 다시 수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에서만 연주되던 이
               면 위로 끌어올린 작곡가는 바로 펠릭스 멘                  곡을 1829년에 베를린에서 연주하며 큰 반향
               델스존(1809-47)이었다. 그의 오라토리오 <              을 얻었고, 그 덕에 이후 많은 연구와 연주가

               바울>(1836)과 <엘리야>(1846)는 단지 오라            이루어져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가 되었다.
               토리오의 부활을 넘어 종교음악의 재건이기
               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에 꽃길만 있는 것은 아니었
                                                        다. 라이프치히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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