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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밑 정동길에 눈물과 기도로 모은
아직 남아 있는 벧엘예배당
예배당 건축비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인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장안의 랜드마크가 된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인데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건축비는 어떻게 마련하였을까?
1895년 8월에 정초식을 거행하고 2년의 공사를 거쳐 당시 아펜젤러는 예배당 건축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1897년 12월 헌당예배를 드렸다. 안식년 동안 아펜젤러가 미국에서 열성적인 모금활동을 한 결과
- 벧엘예배당 설계담당: 요시자와 토모타로 (배재학당 설계자) 선교본부를 통해 특별헌금이 들어왔고,
- 벧엘예배당 시공담당: 심의석 (배재학당, 덕수궁 석조전 공사)
조선에 거주하던 외국인 선교사와 교사들도 힘을 보탰다.
1897년은 고종이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해이기도 하다.
“서울 교회의 벽돌 사는 데 사용해주세요”
이전에는 남자 따로(아펜젤러 사택이나 배재학당), -10달러, 오하이오 테드로 Miss Florence Spring의 S.S Class
여자 따로(이화학당) 모였으나 벧엘예배당 완공으로
“서울 정동교회 건립을 위해 보냅니다”
남녀가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250달러, 펜실베니아 랭카스터제일감리교회 W.A. Haldy
“아펜젤러를 돕는 조선인 조사들을 지원합니다”
이 건물은 주변 외국 공사관과 함께
-25달러,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 Saint Marks 감리교회 목사
‘언덕 밑 신식건물’로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새로운 교회건물을 위하여 Lilian Harris가 보냅니다”
교회당에 지붕을 올린 후 8개월 동안
-7달러,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 19번가 감리교회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시골에서 온 농부까지도
교회당의 구조에 대해 경이로움을 가지고 구경하러 왔으며. 당시 정동제일교회에는 경제력이 없는 학생들과 부녀자들이 많아
교인들과 외국인들도 감격에 겨워 교회당 주변을 맴돌았다고 한다. 조선인 교인들에게 큰 액수의 헌금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
16세의 여학생 이귀동이 머리카락을 잘라 헌금하는 등
그 첫 예배당이 120년이 훌쩍 넘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어 교인들의 정성을 모아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라는 노래말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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