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chungdong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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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은 어떻게

 근대화의 중심이

 되었을까?


 정동에 외국인 주거지가 형성된 것은

 1883년 미국공사관이 그 시작이다.
 정동 민계호 자택을 구입하여 공사관으로 사용한 곳이

 지금까지 미국대사관 자리이다.
 이후로 정동에 영국공사관, 프랑스공사관, 독일공사관이 들어섰고

 아관파천으로 유명해진 러시아공사관도 정동언덕에 있었다.
 그래서 정동은 당시 공사관거리(legation street)로 불렸다.

 더욱이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 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1999년 복원된 옛 이화학당 정문.
 환궁함에 따라 정동은 근대정치의 1번지가 되었다.
                      이화 사주문이라 하여 지붕이
            양옆 담장보다 높게 솟아 있는 솟을대문이다.

 이외에도 선교사들을 따라 배재학당, 이화학당이 들어섰고

 시병원, 보구여관, 삼문출판사, 독립신문사, 손탁호텔,
 그리고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 벧엘예배당이 세워져
                                                        프랑스공사관
 정동이 가히 서양문물의 중심, 문화의 중심,
                                                  이화학당
 교육의 중심, 선교의 중심이 된 것이다.
                      배재학당
                                정동제일교회       시병원                    러시아공사관
 처음 보는 서양식 건물, 패션, 음식, 음악 등
                                            보구여관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한 19세기 핫플 정동.                                   장로회선교기지
                                                             정동제일장로교회(새문안교회 전신)
 그보다 먼저 기억할 것은 정동이 바로                                        언더우드 고아학교
 한국 기독교의 뿌리가 된 거룩한 땅이라는 것이다.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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