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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물 나눔





 크리스마스 선물




 김 동 수 장로
 DSKIM6634@yuhs.ac



    지난해 12월 중순이 다가오면서 나는 한 해를 정리해보는 생각에 젖어있었다. 그   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실옥교회에 전화를 걸고 감사 인사를 드리라고 하였다. 청
 때 불현 듯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 봄, 아산에 있는 실옥교회 조목사님이 봉투를 두   년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였다. 그때 나는, 이제부터 교회에 나가라고 하였다.
 개 들고 오셨다. 하나는 교인들이 정성껏 헌금한 300만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혼  그랬더니 하는 말이, 그렇지 않아도 교회에 다녔는데, 교인들에게 너무 실망을 많이
 부부가 신혼여행 경비를 헌금하면서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환자를 위해 써달  했고, 사람들이 자기 뒤에서 탈북자라고 수군거리며 자기를 이상하게 대접해서 더

 라는 200만원이 든 봉투였다. 교인들의 헌금은 웬만큼 정리를 했는데, 신혼부부가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교회를 다니는 것이 나를 구원해주신
 헌금한 200만원의 주인공을 찾지 못한 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책상 서랍은 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다니는 거니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어보니 그 봉투는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부부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  을 바라보면서 다니라고 하였다. 그는 알겠다고 하면서 이제 다시 교회에 나가겠다
 었다. 그리고 서둘러 해가 가기 전에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사회사업팀장에  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또 “남한 생활이 힘들다고 북한으로 다시 가려고 하지 마세
 게 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하였다.  요”라고 이야기 하자 나에게 하는 말이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는 것이었다. 남한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치료 받은 후에 다시 입북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
    다음 날 사회사업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탈북자인데 부정맥으로 시달리다가   였다. 나는 절대 입북하지 말로 남한에서 잘 적응하며 살라고 하면서, 교회에 다니면

 심부전까지 와서 입원하고 시술까지 받았는데 150만원이 없어서 퇴원을 못하고 있  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니 그의 남한 생활도 돌보
 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그 사람을 내 방으로 불렀다. 그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  아주실 거라고 하면서 용기를 북돋아주고 같이 기도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감사하
 였다. 죽을 고비를 넘어 북한을 탈출하여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와서 잘 정착하고 김  다고 인사를 하면서 내 방을 나갔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나
 치공장을 운영하면서 결혼도 하고 예쁜 딸도 출산하였는데 김치공장이 부도가 나면  머지 50만원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지 그랬냐고 아쉬워했다.
 서 아내와 이혼을 하고 자살을 하려고 한강교의 교각을 오르는데 누가 다리를 붙잡
 고 사정을 하는 바람에 자살도 못하고 지금은 혼자서 고시원에서 살고 있으면서 국     일주일 후 크리스마스 이브 날에 그는 다시 병원에 오게 되어 있어서 다시 전화
 가에서 지원하는 기초수급자로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입원비를 건네주  를 걸었다. 교회를 갔는지 확인하고 다시 내방으로 오라고 하였다. 그는 교회를 다
 면서, 이 돈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고 실옥교회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을 안 하고 주는   시 나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는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에 탈북자 중에서 중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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