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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와 도끼 메고 상소한
함께한 엡웟청년회를
민족운동가 아십니까?
서재필은 미국에서 한인 최초의 의사가 되어 돌아온 후 엡웟청년회는 1897년 창립된 감리교 특유의 청년단체이다.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한 인물이다. 엡웟(Epworth)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영국 출생지명이다.
아펜젤러의 집에 함께 머물면서 배재학당에서 가르치고 엡웟청년회는 조선사회 첫 청년단체로, 청년이란 명칭도
기독교를 바탕으로 계몽운동을 펼쳤다. 처음 사용하였다. 청년회원의 연령은 15~ 35세였다.
윤치호는 미국에서 공부한 조선인 첫 신학자이자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이끈 민족운동가이다. 이를 반대하는 철야 구국기도회를 개최하고
배재학당 교사시절부터 아펜젤러와 깊은 사귐을 가졌다. 대한문 앞에 모여 도끼를 메고 지부상소(持斧上疏, 내 말이 틀리면
도끼로 머리를 쳐달라는 각오로 올리는 상소)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주시경은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고 국어의
체계화, 한자어의 순화, 한글 풀어쓰기 등을 주장하며 엡웟청년회는 성경공부와 신앙훈련은 물론 매주 토론회를
우리말을 통해 독립운동을 실천하였다. 실시하였으며 전도대회, 문맹퇴치, 한글교육 등 계몽활동을 함께 하였다.
타교회와 달리 정동제일교회에서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이 많아
평생을 한복과 두루마기만 입고 다녔다는 절개의 상징 남성은 워른회, 여성은 조이스회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월남 이상재.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고 그러나 엡웟청년회는 1906년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였다.
당시 아펜젤러의 면회를 받으며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상소를 하러 가기 전에 우리 일동은
이승만 역시 배재학당의 학생으로 옥중에서 아펜젤러의
상동교회에 모여 한 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말고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했다.
죽기까지 일심으로 맹약하는 기도를 올리고
위 사람들은 모두 아펜젤러, 배재학당, 정동제일교회를 통하여 일제히 대한문 앞으로 몰려갔다.
기독교에 눈을 뜨고 민족운동에 몸을 바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 김구(당시 진남포감리교회 엡웟청년회 총무)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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