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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몌례는 1872년(고종 9) 마산의 여씨 가문 외동딸로 출생했다.
그가 어릴 때 “딸이 부모와 함께 살면 단명할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들고
이화학당에 버리듯 맡겨졌다.
이름 몌례는 세례명 Mary를 한자식으로 읽은 것이다.
(이후 황씨 성을 가진 교인과 결혼하여 황몌례로 불리기도 했다.
기록에 보면 여몌례, 황몌례가 동일인물로 같이 쓰이는데,
여기서는 원래의 성을 따라 여몌례로 통일하였다)
여몌례는 능력 있고 신실한 교인로 인정받았다.
“여자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이 가하뇨?” 라는 토론장에서,
조이스회 회원들을 지휘하며 일장 연설을 한 것도 여몌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감리교 여성단체인 보호여회에서 여몌례가 회장을 맡았다.
여몌례는 1903년 일본 시찰을 다녀와 현대식 여성교육에 큰 감명을 받고
진명여학교 설립을 도왔고,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계몽 강연회를 열었다.
또한 영어에 능통했던 여몌례는 어전 통역관이 되어
고종 황제 앞에서 통역을 하기도 했다.
정동의 인물 4
세례명 Mary가 몌례라는 이름이 된 보호여회 회장
여몌례
余袂禮 (1872~1933)
보호여회 기념사진. 여몌레가 초대회장이었으나,
이 사진은 좀 더 이후의 것이라 여몌례가 들어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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