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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의 산실 야학의 원조
자랑스러운 <무산야간학교>를
정동성가대 시작하다
정동제일교회가 이 땅에 끼친 선한 영향력 중의 하나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교회의 기본 사역이다.
음악계 발전을 꼽을 수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04년 정동제일교회 엡웟청년회에서
일찍이 선교사를 통해 찬송가를 배우고 절기 별로 음악행사를 가졌다. 처음 야학을 시작하였고, 2년 후 일제에 의해 엡웟청년회가
초기부터 적은 규모나마 성가대가 있었던지, 해산되면서 야학도 문을 닫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1887년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성가대에서 훌륭하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를 찬양하였다. ” 다시 1938년 정동제일교회 엡웟청년회에서는
무산(재산이 없는, 형편이 어려운) 아동들을 위해
정동제일교회는 3.1운동 한 해 전인 1918년 야간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벧엘예배당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게 되었다.
세상에 처음 들어보는 웅장한 음악소리에 모두들 감탄하였다고 한다. 남녀공학이었고 최고연령은 18세,
1929년 이화여전의 음악과장이자 선교사인 메리 영 (Mary E. Young)이 초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놓친 아이들 약 70명이 모여
정동제일교회 성가대의 지휘를 맡게 되며 황금기를 열었다. 성경, 산수, 조선어, 일본어, 음악 등을 배웠다.
이때부터 네 파트를 갖춘 정식 성가대가 활동하였다. 수업료는 무상, 교재도 무상이었다.
1931년 성탄절에는 최초로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무대에 올렸다. 무산야간학교는 5년간 지속되다가
1943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바위고개>의 작곡자 이흥렬, 1970, 80년대 야학의 원조였다.
<그 집 앞>의 작곡자 현제명,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의 작곡자 이유선
등이 정동제일교회 성가대에서 활약하였다.
1933년 정동제일교회 찬양대원과 미감리회 선교사들로
조직된 '한미연합 찬양대'의 성탄절 칸타타 공연 무산야간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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