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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일제의

 한국기독교를   신사참배에

 핍박하다     무릎 꿇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는 본격적인 대륙침략전쟁에 나섰다.  일제강점기 막바지로 갈수록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은 극심해졌다.

 그러한 일제의 수탈에 가장 방해가 되는 세력이 있었으니  전략물자 공출, 강제징용, 위안부 동원은 물론 민족혼 말살을 위해
 바로 조선 민족주의를 지탱해주고 있던 기독교였다.  조선어사용 금지, 창씨개명, 신사참배가 강요되었다.



 조선총독부의 문서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あ              氏
 “내선일체 비상시국에 매진하려는 기운이 넘쳐 있어
 전에 없던 긴장이 감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37     1938   1939          1940
                   황국신민서사를         일본어를           창씨개명법 공포,       조선일보,
 전 조선 50만에 달하는 예수교들은 시국에 대하여
                   학교, 교회에서        국어라 칭하고        국민징용령 실시        동아일보 폐간
                   제창토록 명령         우리말 사용을 금지
 극히 냉담한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다! 조선총독부의 눈에 가장 가시 같은 존재가 바로 기독교였다.

 일제는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 같은 구국의 성경 내용을 금지하였고  일제의 탄압은 신사참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일제 통치를 은유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찬송가들도 금지하였다.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된 사람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논리였다.

 일제가 못 부르게 한 찬송가   기독교는 모진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에 저항했다.
 일제가 지시하여 내린 예배순서  <십자가군병>
                   그러나 기독교 학교들이 하나 둘 폐교 당하면서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물론 잘못된 일이었다.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던

                   신앙의 선배들도 분명 있었다.

                   2006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는 신사참배 수용에 대한
                   참회의 반성문을 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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