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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곤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둑판같은 세상”이야말로 저에겐 작지 청소년들이 게임에 몰두하는 것을 많은 학부모들이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않은 로망이기도 하고요. 현실이 보여주지 못하는 공정한 세계가 경기장에 존재하 이 사실입니다만, 달리 본다면 그들이 어쩌면 반칙도 없고 꼼수도 없는 가상의 사이
기 때문이며, ‘착한 승리’가 더 이상 예외가 아닌 일상인 곳이 스포츠의 세계이기 때 버 세계에 빠져든다고 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속임수와 반칙이 판치는 현실세계와
문입니다. 물론 스포츠에도 그늘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승패에 연연 달리 게임의 세계는 적어도 정정당당한 페어플레이가 통용되는 공간이 아닐까요?
하지 않는 순수한 도전이라는 원래의 정신이 망각되고 그 자리를 돈과 권력을 얻기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몸담고 있는 학교생활 역시 공정한 게임의 룰과는 거리가 있
위한 추악한 승부욕이 대신 차지할 때, 돈으로 심판을 매수하고 선수와 감독이 승부 는 것이 현실입니다. 학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사교육의 가능성이 달라지고, 학
를 조작하거나 약물에 의존해서 신체적 능력을 증강시키고자 도핑을 감행하는 일 군이라는 지역적 격차나 일반고와 특목고라는 상이한 환경이 청소년들의 의지와 무
들이 벌어집니다. 관하게 그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때 묻지 않고 부끄럽지 않은 승
리, 착한 승리의 열망이 가벼운 일상의 심심풀이 혹은 세속적 놀이의 차원에서 표현
가만히 살펴보면 경쟁(혹은 게임과 경기)의 규모가 작아질수록 룰이 단순하고, 반칙 된 것이 오락이고 게임이라면, 그것이 보다 넓고 깊게 종교적 세계관의 형식으로 완
도 쉽게 응징되며, 심판은 불필요해집니다. 바꿔 말하면, 경쟁의 규모가 커지고 참여 성된 것이 기독교와 예수의 복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게임중독만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룰도 복잡해지고 반칙도 빈번해지며, 결국 심판이 필요 아니라면 이들의 게임과 놀이를 시간만 낭비하는 무익한 잡기가 아닌, 선한 승리의
해집니다. 게임과 스포츠와 선거가 모두 승리를 다투는 경쟁이지만 그 규모에 비례 열망으로 봐주시는 것은 지나친 방관일까요?
해서 이 경쟁의 장은 복잡한 통제장치와 규칙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
실을 하나의 승부세계로 본다면, 승리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부활절을 맞아 예수의 승리는 어떤 승리였을지 다시 묵상하게 됩니다. 스포츠 용어
도 땀과 노력이겠죠. 혼자의 힘으로 되지 않으면 협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승리를 를 빌어 예수의 승리를 표현하자면, 그것은 승리 중에서도 가장 짜릿하다는 역전승
위한 분투가 도를 넘어서게 되면 그 순수하고 선한 의미를 잃고 사악한 길로 접어 일 겁니다. 9회 말 투아웃에서의 역전 만루 홈런이거나 축구 후반전 45분도 더 지난
들게 됩니다.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꼼수와 속임수, 음모와 계략, 모함과 함정이라는 추가시간 막판에 터진 역전결승골 아니면 농구경기의 가장 마지막 순간에 승패를
추악한 수단에 의존하게 됩니다. 착한 승리가 어려워지는 이런 세계에서 온당하게 가르는 버저비터였을 것입니다. 아니, 이 모든 극적인 승리보다 더 극적인 역전승이
룰을 지키며 공정하게 경기에 임하는 것이 과연 승리를 얻기 위한 첩경인지 생각해 바로 성서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사건입니다. 부활절이 다가옵니다. 불의한 지배자
볼 때, 머릿속이 많이 복잡해지는 것은 저 혼자만은 아닐 겁니다. 사람들이 스포츠에 들의 악한 승리는 부활절과 더불어 막을 내릴 것입니다.
열광하는 이유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오직 스포츠에서만 볼 수 있는 선의의 경쟁과
페어플레이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공정하지 못한 세속적 질서로부터 순수한 도
* 쉴물특집 코너를 담당하고 계시는 이군호 권사님은 고려대학교 독일어권문화연구소
전과 엄정한 규율의 세계로 잠시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거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에서 독문학을 연구하시고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로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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