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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인간이 자신의 지적 능력을 가장 확신하는 영역이 과학이 아닐까 합니다. 다. 사실 스미스의 이 표현에는 기독교적 낙관론이 깔려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
과학이야말로 불변의 자연법칙에서 출발하여 가시적인 성과를 토대로 인간의 생활 할 수는 없지만 신의 섭리로 모든 우주의 질서가 순조롭게 유지되고 있다는, 따라서
과 역사를 변화시켜온 주역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과학적으로 확실하 현재 이 순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한 상태라는 근대 초기의 낙관
게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많은 것들도 보다 근원적인 물음을 계속하다 보면, 이해의 적 세계관이 경제적 관점에서 표현된 것일 뿐입니다.
한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가령 사과가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자유낙하의 원인을
우리는 모두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중력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저는 헌책방에서의 감동적인 경험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예
하는 물음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저 ‘근원적인 힘’의 하나라고만 설명합니다. 중력은 나 지금이나 저의 믿음은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생각이 한시도 떠나
원래 있는 거라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지구에 낮과 밤이 있고 사계절이 존재하는 이 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거대한 손입니다. 개인의 행동을 주관할 뿐만 아니
유는 명쾌합니다.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왜 지구가 자전을 라 공동체 전체의 조화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은혜의 손길이기도 하고, 징벌의 손길
하고 공전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역시나 ‘원래 그렇다’는 것뿐입니다. 과학 이기도 합니다. 결국 어떤 면에서 종교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대한 종교적 해
적 지식의 많은 부분들은 사실상 이렇게 ‘자연’ 혹은 ‘자연현상’으로 귀결됩니다. 제 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왜 실패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 혹은 왜 이토록 감
가 보기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의미의 ‘자연’을 다른 말로 이해하자면 ‘보이지 않는 사할 일이 많은지, 그 어떤 경우에도 그 배후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의식한다면, 그
손의 개입’이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배후의 어떤 존재를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가 믿음으로 귀결된 결과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나
상정하는 상태인 것이죠. 그 존재의 정체에 대해서는 해석과 신념이 존재할 수는 있 를 채찍질 하는 것이며, 또한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과 재주로
지만 정답은 없습니다. 인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에 직면했을 때, 예술과 철학과 모든 것을 이룬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겸손의 마음, 그것은 나를 이끄시고 도우시
종교가 시작됩니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믿음과 신념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는 보이지 않는 손길에 대한 경외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보이지 않는 손(The invisible hand)’이라는 표현은 영국의 경제학
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시장의 기능과 그 완결성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개
념입니다. 즉 개개인이 시장을 통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에 따라서 행동하게 되
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번영을 가져온다는 설명입니다. 개인
의 경제적 이기심이 어떻게 전체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보
이지 않는 손’의 존재와 개입이었던 것이죠.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시장이 작동하
* 쉴물특집 코너를 담당하고 계시는 이군호 권사님은 고려대학교 독일어권문화연구소
는 배후에 뭔가 보이지 않는 조정자가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입니 에서 독문학을 연구하시고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로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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