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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물 특집
보이지 않는 손
이군호 권사 한 헌책방에 가보니 무려 20권 정도의 낱권들이 새 책처럼 말끔한 상태로 반입되어
ikislee@hanmail.net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총비용도 새 전집의 절반에 훨씬 못 미치는 착한(?) 가
격이었고요. 책이 예뻐 보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네요. 기쁘고 반가운 마음
이야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 못지않게 뭔가 알 수 없는 손길이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아, 내가 이 길을 가라는 뜻인가 보다’ ‘잘못된 선택은 아닌가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좀 더 차분하고 진지하게 책을 대할 수 있었던 듯합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사람의 계획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들이 종
종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도나 생각과 다르게 전개된 현실은 여러 형태의 말들
로 표현됩니다. 홈쇼핑 광고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물건을 구매하기도 하고,
맘에 드는 매물이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되기도 하며, 평
사진·일오삼
소의 태도와 달리 “무의식중에” 심한 말을 뱉기도 합니다. 그렇게도 싫어하던 사람
순수하게 물질적인 측면에서 제 재산목록 1호를 꼽자면, 제가 전공한 독일 작가 과 “뭐에 홀렸는지” 결혼하게 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으며, 고위험성에도 불구하
하이네(Heine)의 22권짜리 전집입니다. 이 전집을 제가 구매하게 된 경위를 가끔씩 고 “정신이 나갔는지” 무모하게 투자했다가 손해를 보았다는 사람들은 지금도 있을
회상할 때마다 저는 삶의 어느 한 중요한 단계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손길이 운명처 겁니다.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지만 그렇게 되어버린 상황 앞에서 나의 계획과 의
럼 저를 이끌어 갔다고 믿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학위논문을 준비하던 1990년대 중 지를 거스르는 그 어떤 힘의 정체는 아마도 ‘알 수 없는 이끌림’ 정도로 밖에는 표현
반이었습니다. 하이네라는 작가를 연구대상으로 잡고 작품과 해설을 두루 읽어보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믿기도 힘들지만 어떻게
니 전집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도서관에 가면 필요한 책들은 널려있었지만, 제가 어 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면, 보통 우연이라고 치부하거나 어떤 초인적 존
디서나 늘 지니고 다니면서 필요한대로 책장을 접어놓거나 마음대로 메모할 수 있 재를 통해서 설명하려 하기도 합니다. 마가 끼었다거나 조상님의 은덕이라는 말, 하
는 그런 전집이 늘 아쉽기만 했습니다. 독일의 학술서적들이 그렇듯이 낱권마다 천 늘이 도왔다거나 천우신조라는 표현 등이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많은
페이지가 넘는 무지막지한(?) 분량에다가 값도 비싸다보니 22권이나 되는 새 책을 것들을 알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서 인간의 이해력의 한계를 넘어서
구입하기에는 부담이 컸었죠. 유학생에게 헌책방은 늘 친근한 곳이었던 터라 단골 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보이지 않는 손’의 개입을 암암리에 염두에 두
헌책방들을 다닐 때마다 수개월째 그 전집을 은근히 찾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인가 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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