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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선교, 섬김의 기쁨이


                                  넘치는 교회




                                                                              송기성 담임목사






                 지난해에는 선교 역사 130주년을 맞아 교계에서 다양한 행사를 가졌습니다. 그 가운데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가 언더우드 선교사님을 배출한 뉴 브런스윅 신학교와 아펜
               젤러 선교사님을 배출한 드류신학교와 연합하여 두 교회를 서로 오가며 함께 예배를 드
               리고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모든 관

               심의 대상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님들에게만 집중되었을 뿐 그 배우자이며 동역
               자인 부인 선교사님에 대해서는 무심코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성을 평가할 때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평가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세 가지를 여성이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성이 만드는 세 가지는 ‘음식’과 ‘의복’
               과 ‘남편’이라고 합니다. 잠언 31장을 보면 현숙한 여인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
               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

               의 인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잠 31:11,23). 이렇게 볼 때 아펜젤러 선교사가 그런 탁월한
               인물이 되고 그런 위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짝지어진 부인
               선교사의 역할과 헌신과 크게 상관되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1884년 12월 17일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님과 결혼한 엘라 닷지(Ella J. Dodge)는 1885년 2
               월 1일 결혼한지 불과 한 달 반만에 선교지 조선을 향해 멀고도 험한 항해를 시작하였습
               니다. 그녀의 신혼여행과 허니문은 아펜젤러 선교사님과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조
               선을 사랑하는 지고의 사랑으로 승화되었습니다. 1901년 아펜젤러 선교사님은 이미 그

               의 모든 것을 조선을 위해 주었으며, 천국도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가게 될 것이라고 했
               습니다. 그리고 그는 1902년 6월 성경번역위원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를 향해 가

               던 중 선박 충돌사고로 소천했습니다. 당시 그 배에 동승했던 미국인 광산기술자 보울비
               (J.F.Bowlby)는 충돌 직후 “아펜젤러는 매우 흥분하여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배에서 피신하
               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생명을 잃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한
               국인 비서와 자기 보호 하에 있던 어린 한국 소녀를 불러 깨우기 위해 그들에게로 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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