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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찬위원회


               아펜젤러 부자에 대한 훈장 청원
               지난 7월 20일(주)부터 3주간, 우리 교회는 배재학원과 함께 헨리 아펜젤러 부자(父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국가 훈장 청원에 참여하여 아펜젤러선교사를위해 1,030명, 헨리닷지목사
               를 위해 1,073명이 서명하였습니다.

               헨리 G. 아펜젤러                              헨리 D. 아펜젤러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무덤            처음 선교사였던 아버지 헨리 G. 아펜젤러가 조선
                의 빗장을 산산이 부수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땅에 교육과 선교, 독립의 씨앗을 심었다면 헨리 D.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고 그들에게 하나님 아펜젤러 목사님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그 씨앗을 싹
                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틔우게 하였고, 꽃을 피게 하였습니다. 헨리 G. 아펜
                                                       젤러 선교사님의 활동이 아들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140년 전인 1885년 부활주일에 한국에 도착한  아들인 D. 아펜젤러 목사님의 사역은 큰 의미가 있습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땅에 발을 디디며 드 니다.
                렸던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이 땅에 이루어
                지도록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가 설              헨리 D. 아펜젤러 목사님은 배재학당 교장 재직 중
                립되어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최초의 근대식  3·1운동 1주년 기념 학생 시위의 책임자라는 혐의로
                중등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 일제에 의해 교장에서 파면되었고, 다시 교장으로 복
                육하여 유교적 구습에 젖어 있던 한국인들을 근대  귀 후 배재학생들을 조선의 민족과 사회, 종교 분야
                문명의 지식과 과학으로 계몽하고, 사회와 국가에  에서 선도적인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가
                봉사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여 우리 근현대사에  르침에 배재의 학생들이 민족의식과 정의감을 굽히지
                큰 영향을 미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습니다. 그뿐 않고 지속적으로 항쟁하는 등 독립 정신을 교육 현장
                만 아니라 애국계몽운동과 항일 민족운동의 산실이  에서 지속적으로 실천하였습니다.
                되어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배출함으로 우리나
                라의 독립과 건국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3.1만세운동 이후 계속된 학생운동 활동에 대해 일
                                                       제가 책임을 물어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선교사님은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열리는  후, 하와이에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논설과 연설
                성경 번역 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을 통해 한국 독립 촉구 활동을 펼쳤고, 진주만 사건
                중, 군산 어청도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 시 같이 승 이후 미국 정보기관에서 한국 전문가로 활동하며 한
                선한 조사이자 비서인 조성규와 정신 여학교 학생 국인들이 일본 국적자로 분류되는 차별 문제 해결에
                을 구하기 위해 다시 배안으로 들어갔다가 순교하 앞장서 왔습니다.
                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였으나 서울
                마포구   합정                                광복 후 귀국하여 한민족 자주 정부 수립의 정당성
                동  양 화진외                               을 국제사회에 알렸고, 한국전쟁 당시 구호 활동에 헌
                국인선교사묘                                 신하셨습니다. 헨리 D. 아펜젤러 목사님은 민족교육,
                원에  가묘가                                반일 활동, 민간외교, 구호 복지 등 분야에 종사하며
                만들어져있습                                 한국을 위해 다년간 봉사하였고, 대한민국 건국에 큰
                니다.                                    공헌을 하며 한국에서 교육자로 헌신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어 나갔습니다.

               이에 개신교 전래와 근대 교육이 시작한 지 140년을 맞이하여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44세
               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서 순교하기까지 약 17년간 교육, 선교, 사회 계몽 등 여러 방면에서 헌신하
               며 한국 근대사와 한글 보급 및 한국 기독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그의 열정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기리며 죽는 순간까지 한국인을 사랑하였던 한국의 좋은 친구, 위대한 스승,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님에 대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청원하였습니다.

               또한 아들 헨리 D. 아펜젤러 목사님의 열정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기리면서 한국 땅에서 태어나 평
               생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고, 한국 땅에 묻히신 헨리
               D. 아펜젤러 목사님에 대한 건국훈장을 청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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